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그분들은 이렇게 반박해요. 기업에게 세금을 거두자거나 국가재정을 투입하면 된다고요. 다시 강조하지만 이 역시 미래세대의 부담입니다. 소득대체율을 올리자고 주장하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세대가 받을 액수에 부합하는 보험료를 내고서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게 없는 소득대체율 인상론은 현세대의 몰염치이고 이기주의예요. 나만, 우리 세대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거죠.

🔖 소득이 많고 오래 가입한 사람일수록 순혜택이 커요. 낸 돈 에 비해서 더 많이 가져간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받는 돈뿐만 아니라 '내는 돈'을 함께 보기 때문이에요. 국민 연금은 재분배 구조(고소득자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소득대체율을 적용)로 설계되었지만, 내는 돈(보험료+가입기간)을 감안하면 노동시장 중심부 가입자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가는 역진성이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국민연금은 은퇴 후 받을 연금액을 보험료율과 무관하게 정합니다(확정급여), 따라서 보험료율 수준이 낮으면 노동시장 중심부에 자리한 장기 가입자일수록 납부하는 절대 액수에서 부담이 줄고, 그만큼 더 큰 순혜택을 가져가는 겁니다. 결국 이런 역진성은 낮은 보험료율과 가입기간 차이가 만든 국민연금의 역설이에요.

🔖 다만 저는 그런 항변이 국민연금에 대한 시민의 불신을 집약한다고 여겨요. 이건 해소해줘야 합니다. 연금개혁의 성패도 여기 달려 있다고 봐요. 원래 국민연금 같은 소득비례 연금이 기여한 만큼 받아가는 원리로 설계된 건 맞아요. 노동시장 참여 여부에 따라 연금을 받을 수 있느냐가 갈리죠. 그렇다 보니 사회가 인정하는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 여성 등 노동시장 외부자들이 연금을 받을 권리에서 배제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들이 빈곤 노인으로 전락하면서, 서구에서는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 시장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연금 수급권을 확대하거나 세금을 지원하는 조치를 해왔어요. 이를 '재조준화recalibration'라고 하고, 그 방법 중 하나가 기초연금이에요. 이와 함께 우리로 치면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 저소득자영업자 등 연금의 사각지대에 있는 불안정 노동자를 위한 지원도 확대해왔는데, 이틀 '표적화targeting'라고 불러요.

🔖 '다층연금체계'란 우리 노후의 대안을 국민연금으로 한정 하지 말자는 이야기예요. 기초연금은 지출액이 20조 원으로 국민연금(34조 원)과 비교해서도 작은 덩치가 아니에요.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대로 연금액이 오른다면 위상이 더 커질 테고요. 퇴직연금도 기업이 노동자를 위해 내는 기 여액이 57조 원으로 국민연금(56조 원)보다 많습니다(모두 2022년 기준). 이 차이는 더 커질 전망이고요. 이 '연금 삼총사'로 공적연금의 보장성을 키워야 합니다. 비로소 제대로 된 한국인의 노후보장 설계가 가능하도록요. 하위계층 노인은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으로 최저소득을 보장받습니다. 중간계층은 세 연금을 적절히 조합해 누릴 수 있어요. 중상위계층 이상은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으로 노후를 준비하고요.

🔖 정치의 부재죠. 보험료를 인상하고, 연금액을 조정하고, 지급 대상을 축소하고, 퇴직금을 연금화하는 건 모두 정치의 영역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모두가 연금개혁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누구도 행동하지 않았어요. 정치가 시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설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판단을 미뤄온 대가가 눈앞의 연금재정 위기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정치겠죠. 연금문제에서 무엇이 진짜 진보인지 대의를 세우고, 그 전선에 함께할 광범위한 지지세력을 규합해야 해요. 고양이 목에 방을 달기라지만 그걸 성취해온 유럽 복지국가들이 있고,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어요. 이제 저출생-고령화-저성장이라는 삼중고를 감안하면 연금 제도 개혁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여러 사회경제적 혁신이 필요한데, 이 또한 정치의 문제예요.

🔖 <동아일보>가 2022년 9월 서울 서대문구 신촌 현대백화점 정문 앞에서 국민연금 관련 즉석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10만 원 더 내자'는 팻말을 내걸자 100명 중 63명이 반대했어요. 닷새 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팻말에 '아이들과 청년 위해'라는 여덟 글자를 덧붙였어요. 반응이 어땠을까요? 67명이 찬성했습니다. 다수가 바뀐 거죠. 어떤 가치로 설득하느냐에 따라 시민들이 '소득대체율 인상 없는 보험료율 인상'에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오히려 준비하지 않은 채 주저하는 건 정치일지도 몰라요.